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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6일 일요일

시묘(侍墓)살이..종교의 교리에 반하는 행동이다.



시묘살이는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자식이 3년 동안 무덤 옆에 살면서 마치 살아 있을 때처럼 효도를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식사를 바치는 것으로 유교 사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대에도 시묘살이를 하는 사람이 가끔 있어서 매스컴을 타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런 행위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TP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TM께서 몇 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글에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요즈음 익명방에 올라오는 글 중에 H2가 아버님이 찬 땅속에서 누워 계시는데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잘 수 없다고 하여 추운데서 정성을 들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읽어보면 시묘살이를 했다든가 추운데서 정성을 들였다는 내용이 감동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아온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원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인간은 영(靈)과 육(肉)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해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은 흙의 요소 곧 땅의 요소를 가지고 만들어졌으므로 땅으로 돌아간다. 곧 흙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영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영이 어디로 가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기독교인들은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불교인들은 업장(業障)을 소멸하기 위해서 윤회(輪回)를 한다고 생각하며, 유교에서는 기(氣)가 뭉쳐진 것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흩어져서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람이라고 칭(稱)할 때는 육신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곧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를 사람이라고 한다.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현상을 죽음으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게 되면 영은 육신으로부터 분리가 되어서 육신을 떠나게 된다.

그러면 남아져 있는 육신은 알맹이가 빠져 나간 매미의 껍데기와 같은 것으로 매미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매미는 아니다.
매미는 껍질을 벗고 창공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매미껍데기를 보면서 매미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모자라거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매미가 창공으로 날아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영혼이 떠나버린 육신은 매미의 껍데기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 사람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죽는 순간 이미 그는 그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는 이미 그곳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냉정하게 보면 그 사람의 흔적과 같은 것일 뿐 그 사람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떠나버린 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과 동일시(同一視)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육신에서 빠져 나간 영을 볼 수 있고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 육신은 입다가 헤어져 벗어버린 옷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고 육신을 그 사람처럼 대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육신이 그 사람 자체일 것 같으면 어찌 땅에 묻을 수가 있으면 화장을 할 수 있겠는가. 육신을 땅에 묻고 화장을 한다는 것은 이미 영이 떠나 버린 육신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으로 멍청하게도 영이 떠나버린 그 육신을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데 그런 생각이 참으로 자신들이 하는 행동과 얼마나 모순이 되는지를 깨닫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영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백번 양보를 해서 그렇다고 치지만 종교를 통해서 영이 육신을 떠나서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영이 천국에 가 있거나 지옥에 가있거나 아니면 윤회를 해서 짐승의 몸 속에 들어가 있거나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거나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 묻은 육신을 그와 동일시 한다는 것은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적인 신념을 배반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원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춥고 깜깜한 땅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떻고 어떻고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식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고 원리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성묘 같은 것도 의미도 없고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육신을 묻어 놓은 장소는 우리가 그 사람을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곳이기 때문에 찾아가서 기억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관계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면 땅 속에서 얼마나 답답할까? 또는 물 속에서 얼마나 추울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정성을 들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이용하는 것이나 TP를 이용하는 것 자체가 ‘나는 원리를 부정합니다’ 라고 광고를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내가 종교인들을 싫어하는 단계를 넘어서 경멸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것들이다.
자신이 종교인이면 종교인으로서 자신이 알고 믿고 있는 교리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행동이 교리에 반하는지 아닌지도 생각지도 않고 자신의 종교의 교리에 반하는 행동을 세상의 관습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솔직히 아무 생각 없이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교리 따로 생활 따로로 살아가는데 사실 그 교리라는 것이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리가 틀렸다는 것이 되는데 틀린 교리를 아무 생각없이 그대로 믿고 교회 밖을 나오면 그 교리는 접어 두고 생활하다가 교회에 들어갈 때 다시 끄집어 내는 이중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대부분 종교인들의 삶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에덴동산이 어디엔가 있어서 아담이 900살까지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해 본 적이 없지 않는가?
과학적인 상식으로 그렇게 살 수 없다면 그런 내용은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 고민도 하지 않고 생각도 해 보지 않으며 그냥 살아가는 지적으로 무책임한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애틋해 하는 것은 자신과의 관계 때문이며 그 관계 가운데 생겨난 기억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들을 간직하고 사진을 간직하여 볼 때마다 그 사람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며 그 사람을 묻어 놓은 장소 또한 그 의미 이상은 아닌 것이다.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육신이 묻혀 있는 장소로서의 의미인 것이다.

매스컴에 보면 시묘살이를 하면서 커피를 대롱으로 꼽아서 무덤에다 붓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무지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익명방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이 사람들은 원리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며 자신들의 말들이 원리와 어떻게 맞지 않는 것인 것을 살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인 것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투자한 곳인데 원리를 들어는 봤지만 깨우치지도 못하고 이상한 소리들이나 하고 있으니....

원리적으로 본다면 나이가 든 사람은 자신이 언제 죽게 되는가 하면서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맞다.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만 들었던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여행을 처음할 때 그 기다림과 흥분을 여러분들은 기억할 것이다.
사실 죽음의 순간도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원리적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죽음이 무섭고 싫다면 여러분들은 원리를 부정하는 사람인 것이며 지금까지의 종교생활을 다 거짓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시인해 할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되지 말았으며 하는 마음으로 쓰는 글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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