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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27일 월요일

군명유소불수(君命有所不受) ㅡ 비록 군주의 명령이라도 따를 수 없는 명령이 있다

        



                             군명유소불수(君命有所不受)

               <비록 군주의 명령이라도 따를 수 없는 명령이 있다>



이는 항명을 해도 좋다는 논리가 아니다.
특수 상황, 특히 전쟁을 치루는 상황에서는 현장지휘관의 작전권과 재량에 관한 문제이며 총체적인 판단의 문제이다.


이러한 말 자체가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의 기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통일가의 형제자매들에게는 혹시나 두드러기 증상을 불러올 수도 있겠지만 엄연한 역사적 진실의 3가지 사례를 밝히면서 그 의미를 공유하고자 한다.


첫째 사례 ㅡ [史記,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

; 춘추시대 齊나라 경공(景公) 때 진(晉)과 연(燕)과의 전쟁에서 연패하자 재상 안영(安嬰)이 병법가인 양저(穰苴)를 천거했다. 양저는 임금께 청했다. 임금께서 신임하는 사람을 감군(監軍)으로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에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장가(莊賈)가 감군이 되었는데 그는 임금의 총애를 믿고 군문에 한나절이나 늦게 도착했다.


양저가 “지금 적국이 깊이 쳐들어와 온 나라가 소동이고 사졸들은 변경에서 죽음으로 싸우며 임금은 잠도 이루지 못하오. 온 백성의 생명이 당신에게 달려 있는데 송별 잔치로 한나절이나 늦게 군문에 늦게 도착한다는 거요!”


그는 군법대로 목을 베고자 했다. 장가는 그제야 겁을 먹고 사람을 보내 임금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양저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미 장가의 목이 떨어졌을 때 임금의 특사가 도착했다. 양저가 소리 높여 말했다.

“장수가 군(전장)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령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말이 곧 그 유명한 장재군 군령유소불수(將在軍 君令有所不受)이다. 



둘째 사례 ㅡ [史記, 손자, 오기열전(孫子 吳記列傳)]

; 역시 같은 무렵 손자병법의 창안자로 잘 알려진 손무(孫武)에 관한 기록이다.
孫子는 이름이 武이며 齊나라 사람으로 병법에 밝아 당시 강국인 吳나라 왕 합려에게 발탁되었다.
어느 날 吳 왕 합려는 손자에게 “내가 그대의 병법저서 13권을 모두 읽어 보았는데, 시험 삼아 그
실제의 연병(練兵)을 좀 보여주지 않겠소?”

“좋습니다.” “아녀자들로도 가능하겠소?” “물론입니다.”


그래서 왕은 총희(寵姬) 둘을 포함한 180명의 미녀를 투입하였고, 손무는 비상시에 대비하여 궁녀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던 중, 두 대장으로 뽑힌 총희가 임금의 권세를 믿고 낄낄거리며 명령을 불복하자 목을 베려하였다. 이에 왕 합려가 특사를 급파하여 용서를 청하였으나, 손무는 “신은 이미 명령을 받고 장군이 되었습니다. 장군은 진중에 있을 때 임금의 명령을 받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고 그 총희의 목을 베자 그때까지 지껄이고 웃으며 장난하던 궁녀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훈련에 열중하였다.
(臣旣己受命爲將 將在軍 君命有所不受)



셋째 사례 ㅡ [선조실록, 유성룡의 징비록, 이순신의 난중일기 참고]

; 1592년 4월에 시작한 임진왜란은 조선강토를 일거에 초토화 시키고 선조임금이 궁궐을 버리고
허둥지둥 압록강 북방 변두리(의주)까지 달아나는 수모를 겪다가 이순신의 장군의 활약과 명나라
군대(이여송)의 지원 및 명의 심유경과 일의 고니시 사이의 강화 협상  등으로 왜적들은 4년여의
분탕질을 잠시 멈추고 부산 일대를 점유한 채 일단 본국으로 후퇴하였다가 재정비한 후 다시
1597년 1월 정유년에 재침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왜적들이 본국을 떠나 대마도를 거쳐 부산항에 상륙하기 전에 기습하여 해상에서 섬멸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왜장 고니시가 첩자 요시라를 통해 알려온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또 다른 왜장 가토를 기습하라는 정보를 신뢰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때는 임진왜란 초기와 달리 적의 수군도 군비와  전략 면에서 방비가 허술하지 않아 오히려 역공을 당할 우려가 적지 않았다. 거기에 추가하여 정보(지시) 전달의 시가가 시간적으로도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어찌 되었건 조수와 해풍 등 종합적 해상여건을 고려해서 공격 시기를 놓치고 가토의 상륙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임금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고 가뜩이나 무능한 군주와 간신들의 안목은 1597년 2월 6일 한참 전투에 고심하고 있는 이순신에게 군령불복종죄로 검거령을 내렸던 것이다. 


물론 이 이후에 전개되는 많은 이야기들은 누가 모르겠는가? 
피투성이가 되어 사경에 이르는 고문, 백의종군, 후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참담한 궤멸, 뒤늦은 복직과 응어리진 명랑해전, 그리고 장렬한 순직의 노량해전, 등등은 우리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진실이다.


구국의 영웅! 성웅 이순신! 멸사봉공 정신의 대명사!

이제 와서 갖은 찬사를 다 갖다 붙일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감히 군주의 명령을 무시하고 불복종했다고 굴레를 씌울 수 있단 말인가? 



君命有所不受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예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의 변함없는 기준은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절대 원칙과 원리와 만상의 근원인 父子之 因緣本然의 心情에 대한 절대신앙이며 절대사랑이고 절대복종인 것이다.


나는 지난 2009년 2월초에 아버님께서 심정적으로 신뢰하시고 무한히 사랑하시는 장자의 위치에 계신 현진님에게 엄명하시고 축수하신 <천주평화연합 194개국 세계 평화순회>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현진님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군주의 지엄하신 명령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곧이어 2월 20일, 21일, 22일, 사흘간에 걸쳐 현진님이 미국총회장이심을 언급하심과 더불어 2월초에 하신 말씀을 보다 구체적으로 재차 같은 지시를 내리셨다. 즉 2월 27일부터 5월31일까지 3개월 기간을 명시하여주셨다.


통탄스럽게도 나는 또 다른 사실도 생생히 기억한다. 보름도 지나지 않아 바로 위의 간곡하고 준엄하신 지시를 손바닥 뒤집듯 돌변하신 아버님의 노기를 보았던 것이다. 이 상반된 명령의 현장이 바로 2009년 3월 8일 속초 영계 메시지 날조 사건현장이다. 이때 현진님은 이미 수령한 君命을 신명을 다해 수행하는 도중이었으나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모든 직을 박탈당하시고 내치심을 받았으니 나락으로 떨어지는 개인의 신상도 신상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아버님의 정성을 우롱하는 악의 실체에 대하여 망연자실할 수밖에 다른 도리를 찾을 수 없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현진님은 1년 동안 아버님 밑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원리공부를 해야 한다는 명령을 거부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현진님의 이러한 태도가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뜻과 섭리를 생각하며 하늘 앞에 축수하시며 심각하게 지시하신 만왕의 왕이시자 親父이신 아버님의 첫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야 말로 곧 장수된 자로서의 본분이며 일시적으로는 불효의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 같으나 영구적으로는 아버님께서 하늘 앞에 한 약속을 지켜드리는 진정한 충효의 길임을 깨닫게 된다.


아버님께서 성화하신지 벌써 2년 반이 지나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흙탕물이 조금씩 가라앉고 보니 이제 진위와 허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끝까지 지켜드리고 복원해야 할 참가정의 위상을 위해 모든 것을 책임지시려는 피눈물 나는 인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풍겨나는 그의 슬픈 미소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고 따뜻한 봄의 향기이다. 때마침 필라델피아에서 울려대는 불쾌한 소음과 대비하니 역시 큰형님의 멋이며 하늘 향한 위로가 분명하다.
믿음직한 장수의 君命有所不受를 오늘 새벽에 다시 보고 있다. 

                                      2015년 4월 27일(월)


댓글 1개:

  1. 현진님 사랑합니다.
    잘못된 명령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래야 장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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