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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25일 토요일

건강하게 성장하는 조직은 유연하고 자율적입니다 (축복2세의 문형진님 지지 발언: 중간글 3-2)

2015.04.25. 10:43 http://cafe.daum.net/W-CARPKorea/cSkJ/25920       

엇그제 문형진님의 한국말 설교를 하나 더 들었는데, 현 교권 지도자들을 계속 “천사장” 이나 “간통자”들이라고 부르시더군요. 당사자가 아닌 저는 솔직히 속으로 계속 키득키득 했습니다. 요즘 시대 별명치고는 좀 특이하잖아요? 당사자 되시는 분들은 참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자기들은 그저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이라고 생각할테니 말입니다. 어쩌다 저런 별명들을 얻으셨을까요?


형진님이 쓰신 “간통자”라는 별명은, 다 아시다시피, 기독교 성경에서 온 것인데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죠. 그냥 배신자라고 부르지, 왜 저런 듣기 민망한 별명을 만들었을까요? 그 배경을 이해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진정으로 어떤 관계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별명 이야기를 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별명속에는 “신과 인간의 관계는 세상의 그 어떤 관계들보다 깊고 친밀하다”는 관점이 숨어 있습니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라고 해봐야, 가장 가깝고 친밀한 것이, 임신한 어머니와 자궁속 태아와의 관계, 혹은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결혼한 후에) 자신의 신체 일부를 상대의 성기에 접촉하는 정도죠.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을때는 그 차원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난 아직 이에 대해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동안 읽은 간증들과 신학 이론들을 종합해 다음과 같은 묘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선 우리의 가슴속으로 들어와 바다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삼켜버립니다. 그때 우리는 당장 죽어도 좋을 것같은 지고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다음엔 우리 머리속에 들어가셔서,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아이덴티티)를 알게 하시고,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다이아몬드같은 예각의 통찰력과 빛나는 지혜를 주십니다. 내 하단전께로 들어오실 때는 금강석같은 의지와 폭풍같은 추진력을 주시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게 오시면 비싼 돈 주고 단센터같은 데 안 가셔도 돼요.) 나따로, 당신 따로, 서로 마주보면서 마치 독자대담 하듯이 하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내 몸과 마음 모든 것을 완전히 감싸 안으시며 당신과 혼연일체를 만들어 버리십니다.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당신의 현존의 에너지가 흘러 넘치도록 하십니다. 이게 바로 “신인 일체”라는 상태입니다.


신인일체하면 우리는 흔히 최영장군의 영인체에 접신한 당골 무당이, 눈에 흰자위 드러내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상상하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절대 미쳐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엄청나게 아름다와 진다고 합니다, 자신의 얼굴 생김새나 키, 몸매와 상관없이. 얼굴에서는 온화하고 밝은 빛이 나고, 눈은 구슬처럼 영롱히 빛나며, 목소리에는 촉촉한 기름기가 감돌고, 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에 신비한 침묵과 향기가 감돕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원래 모습인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의 눈에는 말 그대로 "신인"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참아버님 옆에서 당신을 그렇게 경험했다는 선배 식구님들의 간증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이렇게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한 존재가 어떤 형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육체나 영인체같은 형상이 전혀 없고, 오직 신성과 성령의 에너지로만 존재하시기 때문에, 영인체와 몸을 가지고 있는 인간과 혼연일체 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요즘 세상엔 온갖 전자파들이 24시간 우리 몸을 들락달락 하고 있는데, 몸은 어떠한 저항이나 장애를 전혀 느끼지 못 하죠? 하나님의 에너지는 전자파보다도 더 섬세한 파동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성령이 임하신다고 하는 것은, 그처럼 미세한 당신의 파동이 우리 몸 안밖을 감돌고 있는 상태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어적 묘사는 성령일체의 실제 체험에는 너무나 못 미치는 빈약한 이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성령은 우주 모든 곳에 편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일히 누구를 골라, 들어갔다 나왔다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니, 온 우주는 이미 하나님의 무한한 바다같은 성령의 에너지속에 존재하는 조그만 달걀 같은 것 입니다. 아무리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어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거의 무한대의 우주도, 하나님의 성령의 크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크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포함한 모든 형상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바다속에서 태어나고 죽습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는 항상 그 분의 품안에서 그 분의 생명의 원천에 의지해 생존하고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신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이미 자기 몸과 마음에 들어와 계신 성령을 사람이 비로소 감지하는 것 뿐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이미)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고전 3:16)  이 "감지"가 바로 내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사건이고, 이때 사람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 이다"는 아이덴티티의 확신을 비로소 갖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인간의 몸은, 동일 공간에, 동시에, 하나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관계가 성질상 너무나 깊고, 은밀하고, 친밀해서, ‘마치 신랑과 신부의 관계와 같다’는 표현을 예수님이 쓰셨던 것이죠. 인간들은 대개 사랑하는 두 연인간의 섹스이상 친밀한 관계는 잘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비유를 쓰신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궁극의 친밀함 (Intimacy)을 표현하는 문학적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이렇게 혼연일체된 가장 은밀하고 친밀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신하고 다른 존재와 정을 통하면 세상의 그 어떤 불륜들보다 더 못된 짓을 한 것이 됩니다.  그 친밀함의 정도를 한번 보세요. 엄마와 태아는 한 몸안에 존재해도 서로 구분되는 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둘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지고한 오르가즘을 경험해도, 두 연인은 끝난 후에는 ‘역시 너는 너, 나는 나’로 돌아가는 독립된 존재들 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전혀 그런 경계가 없어요. 궁극적 친밀함속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어 영원히 같이 삽니다.  그 사랑의 깊이도 더 말할 나위가 없죠. 이런 신성한 사랑의 관계를 배신하고 다른 존재와 정을 통하다니요? 그래서, 형진님이 현 교권 지도자들을 “간통자”라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난, 물론, 이 분들이 정말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들(가령, 돈?)에게 더 관심을 갖고 정까지 통했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사실이면 당연히 “간통자들”이죠. 그런데, 난, ‘그들이 하나님과 그 정도로 친밀한 관계나 언약이 처음부터 있기는 했느냐’가 더 궁금합니다. 그런 것이 아예 없었다면 간통이라 할 수 없죠.  대신, 그런 사랑의 언약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한 것처럼 순진한 하나님 속여서, 그 분에게 이리저리 급료만 챙긴 것이 되니까,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이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인간 조상의 타락은, 결국, 하나님과 내가 이런 혼연일체된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을 없애버린 사건입니다.  교회는 그 환경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구요.  그 일이 세계적 규모로까지 커지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제 앞글의 결론이었고, 이 글에서는, 그 오랜 시간을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는 교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제 생각을 발표하려고 합니다. 그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2. 건강하게 성장하는 조직은 유연하고 자율적입니다.


1954년에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 창립으로 출발한 “통일운동” (Unification Movement) 은 현재 세가지 다른 조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가정연합”)
지구평화재단 (“GPF” 혹은“평화재단”)
세계평화통일성전 (“성전교회”)


저는 ‘이 셋이 통일운동 발전 과정에서 일어난 건강한 세포 분열이다’는 긍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통일운동”이란 말을 이같은 의미로 쓴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문현진님(H1)이 처음이시다는 것을 밝혀 두겠습니다. ‘문목사님의 비젼은 통일교회를 초월한 보편적 인류운동이었으니까, 통일교회보다는 통일운동이 그 비전을 더 잘 표현하는 이름이다’는 관점인데, 저는 이에 동의합니다.


가정연합에서 분열한 “평화재단”과 “성전교회”를, 왜, 우리는 이단이라고 부르지 않을까요?  통일교계 다른 이단들처럼 말입니다 – 가령, “정명석” (JMS), “센류 류카,” “생령낙원,” “우 그룹,” 등등. 그 이유는, 평화재단과 성전교회가 역시 참아버님의 정통성을 잇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씨에서 나온 조직들이고, 같은 종류입니다. 두 조직 모두 참아버님을 영적 스승으로 모시며 그 분의 비전을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아버님은 통일운동의 “핵”이시므로, 그 핵을 중심삼고, 마치 전자가 핵을 돌듯이 조직을 돌리면, 겉 모습은 좀 다를 지 몰라도 정체는 똑같은 참아버님이 조직입니다. 이 점에서 두 단체는 가정연합과 동질이며 정통입니다. 창시자 두 분이 혈육적으로도 참아버님의 직계이시니, 이들 조직의 정통성은 이 이상 더 좋은 모양일 수 없습니다.


반면, 이단 (異端) 이란 “싹이 다른” 조직을 말합니다.  일부에서, 이단의 “단”자를 “끝 단”으로 훈하는 천자문식 해석에 의해, 이단을 “끝만 다른 조직”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 데, 잘못된 해석입니다.  여기서, “단”은 “싹”을 가리키는 말이죠. 즉, 식물이 땅위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싹”은 그 식물의 씨에서 뻣어나온 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싹이 다르다는 것은 씨가 다르다는 것이요, 씨가 다르다는 것은 다른 종류라는 것입니다.  즉, 이 이방인들, 정명석, 센류 류카, 우 그룹등은, 혹, 우리와 똑같은 용어를 쓰고, 비슷한 신앙 생활을 해도, 우리와는 종자가 다른 이단들입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참아버님이 아닌 뭔가 다른 씨가 들어있습니다.  현진님 혹은 형진님을 이들과 비슷하게 보는 것은 관점의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한 조직이 강력한 통치 아래 일사분란히 움직이면 마치 하나의 세포같은 통일성을 갖습니다. 조직분열 하기 전 가정연합이 그랬죠. 이 세포가 현진님의 비전과 형진님의 비전을 같이 담기에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운동 전략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니,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고, 그 반탄력들이 일정 수위에 오르며 자연스레 세포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걸 꼭 나쁘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긍정적인 발전 현상일 수 있습니다.  한 세포가, 또는 한 조직이 크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직이 너무 크면 내부 정리가 힘들고, 너무 작으면 작은 조직들을 한꺼번에 관리하는 것이 번거로와 집니다. 적당한 한계에 도달한 세포나 조직이 더 성장하려면, 일단 세포분열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분열된 세포들이 연합하게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원래 세포 하나로 돌아갈 수는 없죠.  그러니까, ‘현재의 교회 분열상은, 분열된 조직들이 미래에 연합하고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라고 긍정적으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 입맛에 좀 안 맞지요, 우리 이름이 “통일” 이니까.  우리는 군소 단체들의 연합보다는 하나의 큰 통일 단체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이제 우리의 입 맛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피아노 4개가 똑같은 건반들을 동시에 빵빵 두드리면, 소리가 통일이 되면서 아주 강력한 음악이 되지요.  <피아노 4대의 합주>인데, 이런게 일종의 “통일 음악”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신, 피아노는 1대만 쓰고, 다른 악기들, 즉,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들여와, 각자의 소리와 가락으로 연주하게 하면 <피아노 4중주>가 됩니다.  각자가 다른 음들을 연주하게 하되 공동의 화성법을 따르게 하면, 다른 소리들이 신기한 조화를 이루며 제3의 “연합된 음악”이 됩니다.  결과에 있어, 피아노 4중주는 피아노 4 합주보다 훨씬 아름다운 음악 연주법입니다. 둘을 동시에 콘서트 하게 한 후, 매표 실적을 비교해 보면 그 효율성의 큰 차이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악기들의 “어울임”을 우리가 “화음”이라고 하고, 화음의 정체는 바로 “조화” (harmony) 입니다.


결국, 분열된 군소 단체들이 서로 연합하는 궁극의 이상은 “통일”이 아니라 “조화”입니다. 조화체를 통일체 보다 더 가치있게 생각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통일 단체 보다는 군소 단체의 연합체가 그 결과에 있어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생태도 더 유연해서, 환경 적응에도 더 유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 통일 운동의 분열상에 대한 저의 최종 결론은 “통일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세 조직이 각자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도록, 각 조직에 속한 식구 세포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는데만 치중하면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세 조직을 연합할 책임은, 일반 식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참 어머님, 현진님, 형진님, 세 분에게 있다고 감히 결론을 짓습니다. 세 분이 서로 손잡고, 다시 옛날로 돌아 가시면, 그 동안 각자 성장한 통일운동의 세 조직은 일시에 3배로 커지는 하나의 연합체가 됩니다. 현재의 분열상,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조직을 건강하게 만되는 것만 집중하면 됩니다. 각 조직이 건강하기만 하면, 나중에 연합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 즉, 세 정상이 모여 같이 식사 하며, 하하 웃고 악수하면, 한 나절이면 다 끝납니다.  나머진 실무는 각자의 스탭들이 천천히 하면 되죠. 그럼, 우리는 ‘언제 그랬냐’ 하며 금방 다시 한 식구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마지막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 조직은 “유연”하고 “자율”적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식구 개개인들이 타고난 성품과 능력을 모두 발휘하는 건강한 세포들이 되고, 그에 힘입어 조직 전체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이 두 원칙 “유연”과 “자율”을 조직의 근본 원리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바탕위에 각자의 조직술과 용병술을 부리면 됩니다. 이 두 원칙이 없는 토대에서는, 그 어떠한 정치적 술수도 얼마 못 가는 사상누각같은 조직들만 만들 뿐입니다.


이 원칙들은 우리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생존력으로 따지면 바퀴벌레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이 생명체들은, 끊임없는 지구환경의 변화, 기아, 추위, 질병, 전쟁, 파시즘, 원폭, 등등 온갖 생존을 위협하는 도전들을 창조적인 지성으로 맞서 어떻게든 살아남았습니다. 결국엔, 고도의 과학과 테크롤로지를 소유한 지구의 정복자들이 되었죠. 이들의 생존과 발전의 키 워드가 바로 “유연성”과 “자율 성”이었습니다. 두 가지 예를 들죠.


(ㄱ) 유연성이란, ‘이것만이 옳다’는 경직된 사고습관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이것이 옳지만 나중에는 틀릴 수도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저것은 지금은 잘못되어 보이지만 나중에는 옳을 수 있다’고 마음을 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교회의 목적은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 옛 사람들은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세대들은 좀 정신나간 소리처럼 듣는다고 가정하죠. 이때, “그래도 그게 진리인데”하고 계속 정신나간 소리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말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지상천국이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마음속에 평화와 행복이 자리잡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평화와 행복이 자리잡은 사람들이 사회에 점점 많아지면 결국엔 그게 지상천국이 될테니까, 따지고 보면, 이런 재해석이 얼굴 싹 바꾸는 파렴치한 변신도 아닙니다.


이건 사실 예수님이 했던 해석이예요.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실제로 로마제국을 쳐부수고 유대왕국을 건설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천일국을 진짜 국가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러나, 진짜 메시아로 오신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는, 정치체계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이 천국과 같이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죄인으로 누명 씌워 사형 당했지만, 당신의 해석은 인류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승화해서, 기독교가 가장 강력한 세계적 종교가 되는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예수의 해석은 시대를 너무 앞 질렀다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뿐입니다.


(ㄴ) 자율성이란 윗선 지도자들이 기획한 방법을 식구들이 모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식구들 각자가 편한 방법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배들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후배들이 굳이 따를 필요는 없다. 더 좋은 방법이 있거든 한번 해 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 모금, 평소 신앙생활에 있어, 식구들 각자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 ‘내 상황에서는 이게 더 효과적이다’고 생각하는 방법들을 마음껏 쓰게 내버려 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그 중 모두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모두가 공유하게 하는 것이죠. 물론, 그 효과적인 방법을 찾은 식구에게는 큰 포상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참어머님이나 대모님의 계시에만 매달려 선교 지침과 방법을 구할 것이 아니라, 선교 현장에 있는 일반 식구님들과 선교사님들의 아이디어들을 “모두” 수렴하고, 서로 자율적으로 경쟁하게 해야 합니다. 역사를 놓고 보면, 하나님은 꼭 선지자들에게만 계시한 것이 아니라, 엉뚱한 곳, 엉뚱한 사건들을 통해 아주 효율적인 계시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적절한 계시를 항상 하고 계시는데, 선지자들이 민중들보다 계시를 감지하는 능력이 더 크기 때문에, 꼭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계시가 내리는 것으로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니까, 식구 개개인들이 자신의 계시 창구를 항상 열어두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하고, 본부는 이런 자율적인 식구들의 행태에 대해 어떠한 제재나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계시의 참과 거짓은 식구들 사이에서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엉터리 계시는 결국 얼마 못 가 착각이었다는 것이 밝혀질테니까요. “홍길동 식구님, 착각하셨네요, 괜찮습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셔서 좋은 계시 받으세요” 하고 너그럽게 용인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하나 조심할 것은, 교회 지도자분들의 계시나 아이디어들은 많이 견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접 당신들이 현장에서 전도하고 모금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 분들이 내는 아이디어들은 대개 윗선에 아부하려는 동기에서, 상상으로 만는 창작소설 같은 것이기에, 듣기는 아름답지만 현실적 효과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는, 사실,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전도나 모금의 현장에서 더 잘 터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 현장은 구체적인 문제가 도전적으로 발생하는 실제 상황이니까, 하나님이 정녕 살아 계시다면, 그 순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나 계시를 현장의 당사자에게 어떻게든 주려고 하시지 않을까요? 그걸 잘 받고 해석하는 것이 개개인들의 능력인데, 선지자가 아닌 우리들은 그럴 능력이 다들 부족하니, 식구 개개인들의 계시적 지혜들을 다 모아보자는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떤 패턴을 발견할 수 있고, 그에 자극받아 좋은 해법을 궁리해 내기가 훨씬 수월해 질 수 있는 겁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들의 생존과 발전의 노하우인 “유연성”과 “자율성”을 종합한 최종 결과로 민주주의를 창안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유연과 자율의 역학속에는 이미 민주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연성”과 “자율성”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나는, 우리가 다음 다섯 가지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에티켓만 지킨다면, 일반 식구님들이 어떠한 비판과 의견을 제시해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것,


(2) 윗선 지도자들의 (참어머님을 포함) 권위적 구조와 문화를 철폐할 것,


(3) 각 교회 단위의 자율적 토론과 결정의 권리를 부여할 것,


(4) 식구들에게 (특히 일본 식구님들에게) 헌금과 전도를 강요하지 말 것. 여기서는 직접적인 강요는 물론, 간접적인 것도 금해야 합니다. 가령, “이거 하지 않으면 당신들 조상이나 후손들이…” 같은 방법말입니다. 마지막으로,


(5) 모든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은 전적으로 식구 개개인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에 맡길 것.


이 원칙들이 지켜지면, 식구 개개인들은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발성에 의해 교회를 떠나는 식구님들도 있겠지요.  이것이 다른 식구님들에게 자극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 공동체에 무슨 문제가 있어 저 분은
불편해 하셨나’고 문제점을 찾고, 같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럼, 교회는 전보다 더 완전한 조직이 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더 완전해지는 조직은 강해질 수밖에 없고, 새로 입교하는 식구들에게는 평생 편안하게 신앙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평생 같이 신앙하는 신도들의 총 숫자, 이게 바로 우리 교회의 진짜 크기입니다.  자율성은 시간은 걸리지만 일을 제대로 하는 원칙입니다.  제가 앞글에서 말한, 섭리에 대한 “시간적 절박감”을 해소할 수 있으면 (인식의 전환을 통해), 교회는 식구개개인들의 자율성을 편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율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미(美)의 근원이 “생명”과 “활기”이기 때문이죠.  아름다움은 일종의 “잉여의 에너지” 입니다.  생명체가 생존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쓴 후에도 여전히 남아도는 에너지가 있을 때,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며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은 곧 매력이며, 이 매력이 새로운 식구들을 끌여들이는 가장 강력한 흡인력이 됩니다.


그러니까, 식구 개개인들이, 혹은 지방교회들이, 자기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시간, 재정, 노동력을, 본부가 자꾸 끌어다가 전체 목적에 써버리면, 결국, 조직을 이루는 개별 세포들은 병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피폐해지고.  병든 세포는 생산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들의 조직인 전체 교회의 힘도 같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그러면 본부는 그를 보충하려고 식구들을 더 착취할 수밖에 없어집니다.  아주 고약한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속으로 병이 든 조직은 아무리 화장하고 치장해도, 보는 사람의 눈을 불편하게 하는 묘한 추함이 있습니다.  이 추함이 확실히 관찰되면 새 식구 전도는 영원히 물건너 갑니다.


종교들간의 생존 경쟁, 결국엔 이런 미추의 역학속에서 노는 게임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종교가 결국 승자가 될 것은 당연합니다.  전, 우리 교회가 밖으로의 치장보다는 안으로 건강을 다져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생명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첫발은 유연성과 자율성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연성과 자율성을 허락하면, 우리 교회가 다른 이상한 종교로 변질되지는 않을까?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비유를 든대로, 우리가 항상 같은 “씨”를 가지고 진화하기 때문입니다.  그 씨는 참아버님의 씨요, 결국엔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 씨를 받지 않으려는 신도는 자발적으로 떠나겠지요.  그러니까, 씨가 바뀔 염려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씨는 필요에 따라 토양이 다른 곳에 심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고, 갑자기 기후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럼, 모양이 다른 식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다른 종류인가요, 씨가 똑 같은데?  우리 교회는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 변하든 참아버님의 “통일교”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위 5가지 원칙을 가장 빨리 수용할 수 있는 조직은 <성전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제가 형진님을 지지하는 세번째 이유 입니다.


이제, 교회는 500년간 시간 있으니 서두를 것 없습니다. 열심인 식구는 더 빨리 천국에 (최소한, 마음의 천국에) 갈 것이고, 아직 준비가 안되어 행동이 느린 식구는 나중에 천국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둘 다 영생하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더 빨리, 혹은 나중에, 하는 시간 문제는 사실 그들에게는 문제가 아닙니다. 각자가 결정한 길을 소신있게 가게 하고, 그에 따른 자연스런 과보를 받게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별 거 아닙니다. 바로 자유 민주주의적 원칙이죠.


이런 민주적 원칙이 작동하지 않는 조직은 절대 500년을 갈 수 있는 자생력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민주적 자율성 아래서 결국 생존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조직은 어차피 지상천국을 창건할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그대로 사그라지게 놔두고,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 낫습니다.


교회가 이런 민주적 원칙들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전 절대 그 교회 신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미래 없는 조직에 나가 봉사하는 것은, 역시 죽을 때까지 무조건 하는, “맨 땅에 헤딩”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머리 아파서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 모든 식구님들처럼, 저는 삶의 남은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더 이상 난센스 활동에 투자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두번째 발언입니다.


다음 마지막 글에서 저는 형진님의 성전교회와 관련 가장 큰 이슈인 “교리 문제”에 대해 제 입장을 발표하고, 발언을 끝내려고 합니다.  사실은, 이 교리 문제가 저의 신앙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아버님은 하나님 자신이신가?”
“그리스도와 메시아는 같은 뜻인가?”
“기독교 신학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통일신학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등등의 질문들에 대한 저만의 답을 한번 발표해 보고자 합니다.


-을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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