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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9일 목요일

섭리라는 이름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이 어찌 섭리이겠는가?

섭리라는 이름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이 어찌 섭리이겠는가?

2013.08.29. 09:47 http://cafe.daum.net/W-CARPKorea/cSkJ/22073

1 섭리에 대해서

 섭리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이 본래 태어난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사는지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 볼 겨를이 없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다가 보니 당연히 하나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생활이나 좌선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우주의 이치를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없으므로 자신이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를 알아 볼 시간도 없이 생을 마감하게 되는 사람들로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은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고 환경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되어져 있기 때문으로 그 책임은 궁극적으로 신에게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은 태어나서 정상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있어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지적으로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가 없다.
가난한 나라나 전쟁 중에 있는 나라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다면 마찬가지로 지적으로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 없다.
 
그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은 그 아이들의 책임이 아니고 부모 또는 국가의 책임이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결국 하나님에게 그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공부를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섭리의 목적인 것이다.
 
그런 환경이 되고 난 다음에 열심히 공부를 하고 하지 않고는 그 학생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그 때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책임을 추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집안이 가난해서 또는 국가가 가난하거나 전쟁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한 아이에게 왜 공부를 하지 않았느냐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난 다음에 인간답게 살았는가 아닌가에 대한 평가나 책임을 추궁할 수는 있지만 먹고 사는 것이 급급한 사람에게 왜 하나님을 모르며 그렇게 밖에 살지 못했는가를 평가하거나 책임추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섭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섭리의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인간의 존재목적 등 원리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을 그들이 이해하고
이 뜻에 동참을 하지 않으면 섭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씀을 전하는 목적이 그 사람들을 통일교인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되어 버리면 사람들은 말씀에 감동은 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등을 돌리고 나가버린다.
그러나 그 말씀이 섭리에 동참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해진다면 그 사람은 남아질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니
간단하게 설명을 하면
첬 번째는 말씀을 듣고 메시아를 믿고 모시는 것이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통일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말씀을 듣고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섭리에 동참하는것이 자신이 살아가는 목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곧 통일교인보다는 섭리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통일교인과 섭리인 중에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본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될 것이다.
통일교인의 입장에서 내 글을 읽는 사람은 불편할 것이며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섭리인의 입장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통일교인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섭리인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왜 이런 이상한 질문을 하는가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나 우리가 어떤 자세 곧 어떤 쪽을 우선으로 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자신이 그런 결정을 하기 이전에 우리의 환경을 통일교인으로보다는 섭리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어나가야 할 책임이 있는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가난한 집에 태어난 자녀와 같아서 아버지와 같이 생계를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는 자녀와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 자녀가 된 자녀라면 아무리 공부를 하고 싶더라도 집안 형편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학교에 가고 싶다는 말을 부모에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만 챙기는 자녀라면 부모의 입장이 어떻든 학교에 보내 달라고 부모를 조를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집에 태어난 자녀와 같은 입장으로 자신의 공부를 뒷전으로 미루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자녀와 같이 신앙을 돌보기 이전에 섭리를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에 있게 되는 것이다.
섭리는 뒷전이고 자신의 신앙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모의 입장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녀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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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희생의 한계에 대해서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을 포기해가면서 섭리를 책임질 수는 없다.
또 다시 그 가난한 집안을 예로 든다면 그 자녀가 결혼까지 포기해가면서 집안을 돌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녀가 집안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에도 한계와 정도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자녀가 희생을 하는 목적은 그 집안이 다 같이 잘 살기 위한 것으로 가족 구성원 중에 회복할 수 없는 희생이 강요되거나 뒤따른다면 그것은 부모가 잘못하는 것이며 그 자녀도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결혼을 포기하고 집안을 부양한 사람들이나,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못하고 늙어간 누나나 형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희생의 정도가 도를 넘은 것으로 희생을 한 사람이나 그 희생을 받은 사람들이나 정말 잘못한 것이다.
 
우리가 섭리를 책임져야 하는 한계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섭리를 책임질 수는 없는 것이며 책임지게 할 수는 없다.
결혼을 포기하면서까지 또는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4대심정권과 3대 사랑의 터전인 가정까지를 파탄시켜서까지 섭리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부모가 집안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 자녀의 결혼을 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그가 가진 가정을 희생하게 한다면 그 부모는 악한 부모가 될 것이다.
더구나 그 자녀의 자녀들까지 희생이 된다면 그 부모가 자녀에게 짓는 죄는 가중될 것이다.
그런 터 위에서 그 가정이 설령 가난을 벗어나서 부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집안의 부(富)는 하나님이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있어서는 안 될 희생을 통해서 그 부가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섭리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섭리를 핑계로 일본의 가정을 핍박하여 헌금을 하게 하여 가정들의 파탄이 일어나고 그 자녀들이 희생되었다면 그 섭리에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가정은 파괴되어서는 안 되며 설령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천리의 법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면 그런 일을 강요한 당사자들은 가정을 파탄시킨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 책임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모른다 하지만 탕감의 법칙을 안다면 어떤 탕감이 올 것이라는 짐작은 갈 것이다.
 
우리는 섭리라는 단어 앞에는 모든 것이 희생되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절대로 잘못된 생각이다.
원리를 파괴하는 희생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지금 일본에서 되어지는 일들은 비원리적인 일들이다.
 
일본 사람들이 지금 헌금하고 있는 것은 일본이 잘못한 것을 탕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어불성설이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정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은 그들의 신앙자세 때문으로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신앙을 이용하여 가정을 파탄시켜 가면서 헌금을 강요하는 그런 종교가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이 번 분신의 사건을 보는 관점이 대부분이 나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섭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니 상관이 없다거나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거나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일이다.
 
통일교인들 중에 그런 일본헌금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그런 신세를 진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가?
 
악담 같이 들리겠지만 그런 헌금에 신세를 진 사람들이라면 여러분들의 후손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리는 여태까지 그 사람들의 피눈물을 삼키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독약을 먹은 것과 같다.
모골이 송연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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